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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기다림 (눅 17:11-19)

양한갑님 | 2021.01.10 12:05 | 조회 26

고독한 기다림


17:11-19


 


 한센병에 대해서

   한센병은 전염병이었고,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이웃과 함께 살지 못하고,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유대 사회는 한센인에게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 잔인한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부정한 자로 정죄하여 성 밖으로 내쫓아버린 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부정한 자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없는 영원히 저주받은 자를 의미했습니다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방법

   한센병을 판정해주는 일은 제사장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일반 피부병을 한센병으로 오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피부병이 회복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모세, 미리암, 나아만처럼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심으로 회복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회복된 환자는 재검진을 요구할 수 있었고, 제사장은 재검을 통해서 완치 판정을 내려주고 마을로 돌아가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그 과정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제사장은 성 밖에서 재검진을 했습니다. 한센병이 나았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한센인은 정결예식을 위해서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은 먼저 새 한 마리를 맑은 샘물이 담긴 질그릇 위에서 죽였습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우슬초 가지를 홍색 실로 묶어 채를 만들어 죽은 새의 피를 찍어 살아 있는 새에게 바르고, 한센인에게는 일곱 번 피를 뿌리고, 새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때 한센인은 자신의 옷을 빨고, 털을 밀고, 목욕을 하고, 자기 집으로 가서 7일 동안 격리를 했습니다. 8일째 되는 날, 피부병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암양 한 마리, 밀가루 6리터, 감람유 3리터를 가지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제사장은 그것들을 가지고 속건제와 속죄를 드려주면 모든 의식이 끝나고, 한센인은 일반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도 유대인과 동일하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피가 그들에게도 있지만, 북왕국이 앗시리아 제국에게 멸망을 당한 후에 이방인과 혼인함으로써 아브라함의 순수 혈통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형제로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에는 발도 드려놓지 않았습니다.

 

   위에 있는 세가지 사실을 이해하고 오늘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시고 계셨습니다. 그 길은 골고다를 향해서 내려가시는 마지막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 길은 사마리아 접경 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의도적으로 피하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로 한참을 가시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서 샛길로 들어가셨습니다. 뒤에서 궁시렁거리며 따라가던 제자들은 갑자기 뒷걸음을 멈췄습니다. 천으로 얼굴을 감싼 한센병 환자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직 거리가 먼데 한센인들이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한센인들이 먼저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입니다.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주 무대는 갈릴리였습니다. 갈릴리 가까이에서 살았던 그 한센인들이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한센병 환자로서 무리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먼 거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말씀도 듣고, 예수님이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보면서 그 은혜를 간절히 사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그 한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갔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갈릴리를 마지막으로 떠나시면서 그 한센인들을 기억해 주셨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축복의 발걸음을 한센촌으로 향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지체하지 않으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한센인들은 제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서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열 명의 믿음이 대단했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여전히 한센병이 가득했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그 말씀을 믿고 곧장 믿음의 달음질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숨차게 달리다가 한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친구들, 잠깐만, 잠깐만 서봐. 내 팔을 봐. 아니 자네 팔도 좀 보세. ! 이럴 수가!” 그들은 서로의 몸을 만지면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센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은 열 명 모두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때 안타까운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대 사마리아인. 유대인 아홉 명은 제사장을 향해서 달렸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향해서 달렸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찢어졌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레위기에 명시된 종교적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하 일 주일 이상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예수님께 인사하는 일도, 감사하는 일도 나중이었습니다. 제사장에게 판정을 다시 받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들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아온 사마리아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 유대인들도 기다리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가서 제사장에게 보이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은 그들을 시험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은 무엇이 먼저냐?”를 물었던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에서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향해서 뛰었고,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은혜]를 향해서 뛰었던 것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하고, 한 걸음은 늦겠지만 그 뒤에 제사장에 갔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어떨 때 우리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축복이 됩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지금도 모세의 율법에만 얽매여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율법의 이행은 아홉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의 존재를 무시하게 만들고, 예수님의 은혜를 저버리게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아니었던 사마리아인은 제사장을 향해서 달려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설령 그가 제사장에게 갔다 해도 유대인 제사장이 그를 검진해 주었을까요? 사마리아인이 가지고 간 제물을 유대인 제사장이 그를 위해서 속건제, 속죄제를 드려주었을까요? 그래서 사마리아인이 제일 먼저 생각했던 것은 모세의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도 아니었고, , 비둘기, 백향목, 우슬초, 홍색 실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돌아서서 예수님을 향해서 더 빠른 걸음으로 달렸습니다. 혹시 예수님이 다른 곳으로 떠나시고 그곳에 없다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조마조마했던 가슴은 예수님을 보는 순간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예수님께서 움직이지 않고 그 곳에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1막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2막에 있습니다. 2막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일어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입니다1막의 주제는 [기적]이었고, 2막의 주제는 [구원]이었습니다. 1막의 주인공은 [사라진] 아홉 명 유대인들이었고, 2막의 주인공은 [돌아온]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앞에서 말씀드린대로 예수님의 시험은 기적이 먼저냐? 구원이 먼저냐?”였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에서 낙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을 기적과 축복에 둡니다. 며칠 전에 거리를 걷다가 한 교회의 대형 버스 좌우 몸통 전면에 붙인 커다란 문구를 보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정 교단을 언급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그 내용을 공개하면 어차피 그 교단이 언급될 수밖에 없습니다. 버스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조용기목사님 제자 교회. OO순복음교회에 오시면 확실한 성공과 축복을 받습니다.”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교회가 아니라 누구누구의 제자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메시지가 아니라, 그 교회에 등록하면 확실한 성공과 축복을 보장해 주겠다는 식의 메시지였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축복이 먼저가 아닙니다. 구원이 먼저입니다.

 

   감사는 허리를 숙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경배는 허리를 꺾고 머리를 땅에 대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다고 했습니다. “발아래라는 표현은 그의 이마를 예수님의 발이 있는 땅에 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감사와 경배를 함께 드렸다는 의미였습니다. 경배가 없는 기적은 의미가 없습니다. 경배가 없는 축복도 의미가 없습니다. 한센병이 나은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그 기적에서 끝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까지 가지 못했습니다. 축복과 구원을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립던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된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긋지긋했던 한센촌에서 빠져 나오게 된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이 아니었습니다. 지옥에서 빠져 나온 것이 구원이었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십 번 기적을 받은 사람도 결국 죽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 그것이 사마리아인이 받았던 구원이었습니다. 그 구원을 사모해야 하고, 그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거기까지가 제2막이었습니다.


   이제 제3막으로 가겠습니다. 3막의 주인공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열 명의 한센인들이 떠났을 때 제자들도 그곳을 빨리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유대인이었습니다. [부정한] 한센인들이 살았던 [부정한] 땅에 단 1분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미동도 없으신 예수님께 주님, 안 가십니까?”라고 재촉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한 자리를 정하시더니 그곳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한센인들이 떠났던 텅 빈 길을 아련히 바라보고만 계셨습니다. 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해가 떨어지는 시간까지 예수님의 [고독한 기다림]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한 사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와 경배를 드렸기 때문이었습니다.

 

   텅 빈 길에서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던 예수님을 보면서 제자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예수님께는 그가 누구냐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가되어야만 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는 그가 유대인이든, 사마리아인이든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난] 아홉 명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지만, [돌아온] 한 사마리아인에게는 구주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초기 사역 때 야곱의 우물 가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수를 주셨던 일을 다시 한번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역의 마지막에서 다시 한 사마리아인에게 구원을 선포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제자들은 열방에 있는 이방인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큰 교훈을 배웠을 것입니다. 


   선교사에게 주어진 선교 무대는 [고독한 기다림]이 있는 제3막입니다. 닫혀진 문이 다시 열리면 필리핀으로, 미얀마로 빠른 발걸음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나 인도로 가라 하시면 인도로 가고, 라오스로 가라 하시면 라오스로 가고, 인도네시아로 가라 하시면 인도로 갈 것입니다. 그곳에 있는 더 낮은 땅으로 내려가라 하시면 또 더 내려갈 것입니다. 그 낮은 땅에 앉아서 예수님께서 찾으시고,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한센인들을 만날 수 있다면 내려가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고독한 기다림이 힘들고, 그 기다림의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느리고, 너무 길지라도 그들을 기다릴 것입니다. 한센선교는 고독한 선교입니다. 그러나 기쁨의 선교입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았던 사마리아 접경 지역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기다리셨던 예수님은 고독한 기다림 끝에 한 영혼을 찾고 기뻐하시는 목자이셨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 교회와 우리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 고독한 기다림 끝에서 잃은 양들을 더 찾게 되는 큰 기쁨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우리의 고독한 기다림은 결코 헛된 것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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