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가옥 중에 니파 초가집 (Nipa Hut)이 있다. 바하이 쿠보(Bahay Kubo)라고도 부른다. 모두 “나무 잎사귀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400년 전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을 정복하기 이전부터 원주민들이 거주했던 필리핀 전통 가옥이다. 현재도 시골 가옥의 대부분이 니파 초가집이며, 대도시 서민들의 주거지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니파 초가집의 기둥, 바닥, 벽, 창문, 천정의 모든 재료는 대나무이다. 지붕은 바짝 말린 야자나무 혹은 종려나무 잎사귀를 두텁게 엮어서 덮는다. 방 바닥이 지상에서 떨어져 있고, 사방은 대나무 틈 새로 뻥 뚫려 있기 때문에 집안은 마치 냉장고처럼 시원하다.

그런 니파 초가집에서 필리핀인의 정서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니파 초가집에는 방이 없다. 2평이든, 3평이든, 5평이든 니파 초가집의 구조는 오직 넓은 공간 하나만 있을 뿐이다. 아빠, 엄마 그리고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함께 자는 한 공간만 있을 뿐이다. 현대 가옥에서는 부엌, 거실, 화장실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방도 부모 방, 오빠 방, 언니 방, 동생 방으로 나눈다. 그러나 니파 초가집에서는 그런 “나만의 공간”은 찾을 수가 없다. 혹시 여자들이 옷을 갈아 입을 때 공간이 필요하게 되면 얇은 천을 철사에 묶어 포장을 쳤다가 사용 후 거둔다.

니파 초가집에 있는 것은 다 내 것이 된다. 나만의 것, 나만의 공간이 없는 니파 문화권속에서 생활하는 필리핀인은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남의 물건에 대해서 사전 허락을 요청하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내 것처럼 사용한다. 비전 센타에서도 문이 열려있으면 “들어가도 될까요?”라고 묻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누구든지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

니파 초가집에는 비밀이 없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들린다. 숨길 것도 없고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나 같으면 숨기고 싶은 가정 이야기도 다 털어놓는다. 아버지가 몇 명의 아내를 두고 있고, 자기는 몇 번째 부인의 아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래서 어렵게 물어볼 필요가 없이 시간이 지나면 그들의 가정환경을 니파 초가집처럼 쉽게 그리고 환히 그리고 자세히 들려다 볼 수 있다.

니파 초가집에는 언제든지 누군가가 있다. 니파 초가집에는 자물쇠를 설치할 수가 없다. 사방이 뚫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집에 있으면 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집을 지킨다. 혼자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혹 혼자 있을 경우에는 라디오나 음악 CD를 크게 틀고 있는다. 방 하나에서 온 가족이 뒹굴며 사는 니파 문화권 속에서 사는 필리핀 사람들은 그래서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조용히 혼자 사는 것을 몹시 힘들어 한다.

니파 초가집은 끈끈한 가족애를 만들어 준다. 몬트리올에서 살 때 보면, 같은 모양의 집 보기가 힘들다. 각각의 집 모양이 독특하다. 자기 취향에 맞는 집짓기를 좋아하는 퀘벡 주 사람들의 문화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것은 극히 개인주의에 가까운 문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리핀의 니파 하우스는 어디를 가도 똑같다. 독창적인 것이 없다. 집 안에 방이 하나만 있듯이 그들은 어디를 가도 하나이다. 서양 사람들은 100년을 내다보며 오랫동안 자신만의 집을 튼튼히 짓는다. 그러나 필리핀 사람들은 며칠 만에 니파 하우스 하나를 뚝딱 짓는다. 그러나 그들은 10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끈끈한 가족애를 그 니파 하우스 안에 짓는다.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을 정복하고 나서 모든 건축물들을 돌로 짓는 공법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집, 성당, 상점, 성(城), 모든 것들을 돌로 지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그들은 성 안에 있는 모든 거리까지 돌로 포장을 했다. 지금도 마닐라에 있는 인트라무로스 (Instramuros: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성)에 가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돌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필리핀 사람들은 돌로 지은 집을 Bahay na Bato (바하이 나 바토: 돌집)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돌집에서 수 천 년 동안 살 것 같았던 그들은 지금 없다. 그러나 지푸라기 초가집 [니파 하우스]에 사는 필리핀 사람들은 태풍에 집이 홀랑 날라 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다음 날 다시 니파 하우스를 짓고 하하호호 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태풍에 잃어버린 것은 대나무와 지푸라기뿐이라고 생각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가족만 안전하다면 잃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필리핀 사람들이 늘 웃으며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삶이 그런 니파 문화에 깊이 젖어있기 때문이다.

필리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지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집이 아닙니다. 방 하나만 있는 니파 하우스라도 좋습니다. 우리는 그 방에서 가족의 끈끈한 사랑을 만들어 갈 수 있으니까요.” 그처럼 필리핀 사람들은 니파 하우스의 한 지붕 아래에서 따뜻한 가족을 만들어 간다.